유물을 만나다 (12)조선시대 백자 청화 수복문 대접
- 작성자 학예사
- 작성일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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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백자 청화 수복문 대접’은 조선시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청화백자는 14세기 전반 무렵 중국의 경덕진(景德鎭) 가마(강서성 부량현 흥서현)에서 개발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고급 백자이다. 백색의 자기 태토 위에 코발트(Co)를 주성분으로하는 금속화합물의 청색 안료를 붓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투명한 유약을 그 위에 씌운 뒤 1,250°C~1,400°C의 높은 온도에서 환원 소성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15세기부터 중국의 영향으로 청화백자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제작 초기에는 중국이 이슬람에서 수입한 청화안료를 재수입하여 사용하였고 이후 중국이 자체 개발한 청화안료인 회청(回靑)과 국내산의 토청(土靑)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듯 청화안료의 수급과 가격이 안정됨에 따라 조선 후기로 갈수록 백자 위에 청화(靑畵)장식이 많아졌다.박물관 소장의 이 백자 청화 수복문 대접은 약 14cm의 높이로 대접 중에서도 높고 입구가 넓다. 기면에는 도안화된 수복(壽福)의 길상문이 배치되어 있으며, 굽은 넓고 기면이 두꺼워서 안정적인 앉음새를 보인다. 굽 안에는 ‘덩유가례시 큰뎐고간이뉴 일듁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그릇의 제작 후에 생긴 것으로 생각되는데, 정유년인 1837년 헌종대에 가례 시 사용되었다는 표시를 한 것으로 사용된 시기와 궁중용 그릇으로서의 쓰임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대접은 조선후기 청화백자의 조형미를 가짐과 동시에 국가의 큰 행사에 사용되었던 궁중용 그릇으로서의 사용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